치치댁 뉴질랜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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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일상

190203 | 회사에 대한 소감과 나와 잘 맞는 편안한 삶

치치댁 2024. 1. 19. 10:45

일요일. 맑음

벌써 2월이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아무래도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다. 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잘 지내고 있다. 인생에 이만큼 근심 걱정 없이 평온한 때가 있었던가 싶다. 안 풀릴 때는 한없이 답답했는데 한 번 풀리고 나니까 제일 만족도 높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의 삶이 나한테 굉장히 잘 맞는 형태의 삶인 것 같다.

직장의 물리적 측면부터 살펴보자면 우선 한국을 떠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획득해서 너무 좋다. 9시 출근 5시 퇴근이니까 기본적으로 한국에서보다 일하는 시간 자체도 적고(점심시간 30분씩을 빼면 일주일에 37.5시간 근무다) 업무 강도도 적당함과 낮음 사이다. 다들 출근 시간 몇 분쯤 전에 회사에 도착해서 다섯시 땡 하면 집에 간다. 출퇴근 시간도 차 타고 15분에 길 막히는 것도 거의 없어서 아주 이상적이다. 한국에서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이상씩 출퇴근 하던 때는 사람이 많은 대중교통의 답답한 공기, 옆 사람과 부대끼면서 접촉되는 불쾌함, 교통 체증, 고속도로에 사고라도 난 날은 지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회사 도착과 동시에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었는데. 초과근무와는 별개로 도로에 버려지는 시간 때문에 더 삶의 질이 낮았던 것 같다. 크라이스트처치라고 사실 다 가까운 건 아닌데 집이랑 가까운 곳에 취업이 된 건 순전히 운이긴 하다.

업무적 측면으로는 디자이너가 나 혼자라 처음에는 좀 걱정되기도 했고 다른 디자이너랑 교류가 없으니 배울 기회가 없다는 건 아쉬운 점이지만 오히려 유일한 디자이너여서 비교될 것도 없다는 건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건 다들 디자이너가 아님에도 일을 굉장히 합리적으로 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 한국은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이유가 안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이런 건 금방 하지 않냐거나, 말도 안되는 컨텐츠를 말도 안되는 공간에 넣기를 요청(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된다는 걸 알텐데 요청하는 사람이 생각 없이 막 집어 던지는 느낌)하는 등의 일들이 그 예다. 그런데 여기는 미리미리 요청해서 넉넉하게 마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게 기간을 주고, 변경사항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으면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끔 확실히 보류를 해준다. 한국에서는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일단 한번 이렇게 해봐주세요" 한 다음에 엎어진 일들이 파다했지... 지금 회사는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화면 구성에 대해 본인들도 요청하기 전에 고려를 해보고 요청을 해서 일을 받고 말도 안 된다고 느꼈던 적이 아직은 없다.

직장 외의 삶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인생에서 엄청난 재미를 찾거나 하는 유형이 아니어서 단순한 삶이 좋다. 일 끝나면 운동하고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점심 도시락 싸고 왕좌의 게임 보는(이제 시즌 7 본다) 소박하고 아무 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주말엔 늦잠 자고 집안일 좀 하고, 일요일엔 성당 가고, 빈둥거리고 가끔 블루베리 따러 가고... 이제 블루베리 철은 거의 지났다. 여기서 점점 자연인이 되어가고 있다. 점점 더 아무것도 안 바르고, 머리도 안 하고, 옷도 제일 편한 것만 입고, 외식도 안 하고, 식료품 외에는 쇼핑도 아예 안 하는... 근데 너무 좋다. 엄청 편한 게 나랑 잘 맞는다. 이제 소셜 미디어나 애들 모임 사진에서 예쁘게 꾸미고 있는 걸 보면(사실 내 친구들은 엄청나게 꾸미는 애들도 없는데도) 생소하게 느껴진다. 옷 근사하게 잘 입고 예쁘게 꾸미고 소비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고 그걸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나는 외적인 것에 신경쓰지 않고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 문화가 나랑 잘 맞는다. 한국에서도 되게 막 하고 다닌 편이었지만 사회적 분위기를 아예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은근 스트레스였는데 여긴 다들 프리하고 아무 신경도 안써서 정말 편하다. 마음의 부담 없이 마음껏 후줄근하게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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